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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식량 징발 == >"먹을 것이 모자라면 끼니를 줄이면 된다. 흉년에 사람이 죽는 것은 옛날에도 있던 일이다." >---- >1959년 봄, 각지의 기근 보고를 받은 려우 즈카이의 말로 전해지는 발언 >"우리 인민은 원래 풀을 먹고도 산다." >---- >1960년 델라웨어 기자 에리히 발트와의 인터뷰에서 려우 즈카이가 한 말 1959년 청평의 곡물 생산은 여러 실책과 자연재해가 겹쳐 크게 줄었다. 그러나 청평은 사비에트에 "상환을 늦춰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려우 즈카이 특유의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고, 체제 경쟁의 한가운데서 자국의 기아가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려우는 전국 수확량의 3분의 1을 징발하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지시했다. 징발된 곡물의 우선순위는 수출과 수도 띠에우리엔, 대도시, 북부 공업 지대의 순이었고, 농촌의 필요는 철저히 뒤로 밀렸다. 1960년에는 '수출 제일' 방침이 채택될 정도였다. 지도부는 대약진의 성공을 선전하기 위해 우방국에 곡물을 무상으로 보내고, 외국 대표단을 초청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플로렌시아 좌파 정치인 대표단과 델라웨어 대표단은 풍성한 식탁과 가득 찬 창고를 보고 돌아갔지만, 그 창고의 문은 굶주린 농민을 위해 열리지 않았다. 당시 띠에우리엔에 주재한 [[동사랜드]] 외교관 도안 반 푹은 훗날 "청평 사람들은 우리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주었다. 나는 그들이 굶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식량은 무기였다. 굶주림은 몽둥이보다 먼저 쓰이는 처벌이었다. 공동식당에서 죽을 푸는 국자는 사람의 얼굴을 읽었다. 당에 충실한 노동자에게는 솥 바닥까지 국자가 내려갔고, 반동으로 찍힌 이에게는 표면의 멀건 물만 떠 주었다. 한 농민은 그 죽이 "푸르스름해서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고 기억했다. >---- >앙투안 르베르, 《굶주린 제국: 청평 대기근 1958~1960》(2010) 1960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사비에트는 청평이 곡물 대금을 제때 갚지 못하자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1959년부터 원조를 줄였고, 1960년에는 기술자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청소합작으로 약속된 핵과 미사일 기술은 끝내 이전되지 않았다. 대약진을 둘러싼 노선 갈등과 려우의 공개적인 조롱, "핵전쟁이 나도 청평 인민은 살아남아 새 세상을 세운다"는 그의 발언은 사비에트 지도부의 경계심을 키워 결별을 굳혔다. 그해 말 사비에트가 채무 상환 유예와 곡물 대여를 제안했을 때에도 려우는 "사비에트에 빚을 지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1960년 가을이 되어서야 청평 정부는 곡물 수입을 승인했다. 플로렌시아와 델라웨어에서 곡물이 들어왔고, 국교가 없는 루이나산 곡물도 제3국 상사를 거쳐 수입되었다. 1960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들여온 곡물은 약 160만 톤으로, 1959년 청평이 해외로 내보낸 곡물의 절반을 조금 넘는 양이었다. 공동식당 같은 정책도 이 무렵 일부 폐기되었다. 일부 논자들은 기근 보고를 받고도 징발을 늘린 려우의 고집을 들어 대약진을 '정책 실패'가 아니라 학살로 분류하기도 한다.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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